인간의 생각과 시선으로는 따라갈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시선과 생각이다. 학원을 처음시작하려는 키르기즈스탄 쇼포코프 마을은 수도로부터의 위치로 보나 생활기반으로 보나 형편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는 백 년을 내다본 대학교의 위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학을 시작한 지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키르기즈스탄은 동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 남쪽으로는 타지키스탄, 그리고 북쪽으로는 카자흐스탄을 연접한 초목지대면서도 중앙아시아의 깊은 내륙에 위치해 있습니다. 특히 중국과의 경계를 따라가면 해발 5천미터에서 7천미터 이상의 산들이 즐비합니다. 천산산맥이 중국에서 시작돼 동서로 뻗어있어 이 나라를 남북으로 가르고 있습니다. 평지처럼 보여도 수도 비쉬켁의 고도는 해발 800미터에 이릅니다. 깊은 산 속에 둘러쳐져 있는 느낌이라 수도 비쉬켁은 여름에는 선선하고 겨울에는 춥습니다. 시베리아의 한랭한 기단이 넓은 초원지대로 내려올 때는 영하 30까지 내려가며 겨울에는 추위가 맹위를 떨칩니다.
우리 학원은 다행히 수도 가까이 위치해 해발 790미터 고지에 있어 엄동설한은 피할 수 있습니다. 실크로드 천산북로 에 위치한 우리 학원은 비쉬켁 중심부에서 서쪽 우즈베키탄 방향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설립자 윤광열 장로께서 이 곳 건물과 땅을 구입하기로 결정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분을 아는 많은 선생님들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하필 이런 변두리의 건물을 사느냐고 말렸습니다. 도시도 농촌도 아닌 ‘중간지대’, 산업도시로 특정지을 수도 없고 아무런 도시특성도 지리적 잇점도 없는 땅이라고 보기때문이었습니다. 발전 가능성이 많은 수도에 인접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토지 전문가나 도시설계자들의 안목에서 보면 정말 어정쩡한 위치의 땅이었고 낙후된 낡은 2층 건물이었습니다.
키르기즈스탄에 미리 와 둥지를 튼 많은 선생님들, 또 윤 장로를 아는 많은 선생님들이 그래서 이 곳을 사지 말 것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윤 장로는 단호했습니다. 결국 KIUC국제대학교가 된 이 곳 건물과 땅을 매입했습니다. 믿음으로만 구입한 것입니다.
주위의 강력한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 곳 부동산을 매입한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윤장로께서 기도 도중에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곳에서 나의 양을 먹이라”고 세번씩이나 확신을 주셨기 때문에 설립자 장로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추호의 의심 없이 이 곳 부동산을 매입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대학의 위치로) 부적절 한 곳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백 년을 내다 본 최적의 대학위치였다는 것을 안 것은 솔직히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2010년 말 구입한 이 땅은 대지 8천 제곱미터에 들어 선 낡은 2층 건물. 40년 전 지은 건물은 복도를 걸으면 삐걱거릴 정도로 허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구 소련 때 유치원을 하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문짝은 맞지도 않았고 게다가 페인트칠도 오래되어 허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데서 어떻게 대학이 발전하고 있는 지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2012년 9월 내가 투입되었을 때 대학은 커녕 일반 학원도 시작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윤 장로로부터 비가 새지 않도록 외관을 개선하기 위해 현지인 관리인을 두고 건물의 지붕은 고치셨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키르기즈스탄에 오기 전 설립자 장로와 대학교의 비전은 공유했지만 이 정도일 것으로는 솔직히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은 커녕 학원을 시작할 수 있는 행정적인 서류도 하드웨도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내부 건물 수리도시작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내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높고 크신 그 분의 인도를 믿고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 분은 한번 하신다면 하시는 분이라는 것만 믿었습니다. 현실을 직감하고 우선 교육부를 방문해보았습니다. 대학교 승인 절차를 알아보려고 한다니까 리셉션에 있는 교육부 직원들이 비웃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러시아에서 근무하고 공부한 덕택에 현지인과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장점이었습니다. 조금 나중일이지만 매일 새벽 학교 운동장 한 켠을 산책하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한 주간 내내 새벽산책을 할 때마다 들려왔습니다. ‘나의 일을 위해 내가 너를 준비시키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때까지 나는 대학을 세워 많은 믿음의 중앙아시아의 청년들을 세우겠다는 원칙만을 설립자와 공유만 했지, 내가 키르기즈스탄에서 대학교를 시작하는 것이 그 분의 원대한 계획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내가 만난 키르기즈스탄 교육부 간부와의 미팅때였습니다. 그는 처음 한국에서 온 외국인 한 사람이 그냥 사업에 대해 알아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형식적으로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나에 대해 듣고 또 내가 현지어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직감한 후부터는 진정성 있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는 그 때 “먼저 영어교육을 하는 학원을 시작해보라" "그래서 경영능력이 검증되면 칼리지를 신청해보라”며 친절한 권고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영어학원에 대한 라이센스는 주겠다는 것입니다. 원장이 내가 한국인이므로 나는 우선 한국어와 영어학원 선생을 구하면서 동시에 건물보수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겨울이 다가왔으므로 우리는 석탄 보일러도 수리해 테스트했습니다. 미국에서 5명 정도의 지원선교팀이 학원개설 전까지 다녀갔습니다. 항상 설립자 윤장로께서 리드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교실에서 찬송을 하며 주의 군사로 용기를 다졌습니다. 나는 학원이 수도 비쉬켁과 너무 떨어져 있어 아예 숙소를 학교 교실로 잡았습니다. 우리는 학원이 될 건물 1층 부엌 가까운 교실에 1인 침대 세 개를 놓아 지원팀의 임시 숙소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선교팀이 올 때도 수도 비쉬켁에 숙소를 따로 잡지않고 교실을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비쉬켁에 따로 숙소를 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출퇴근도 시간이 많이 걸려 불편했고 출퇴근 하면 수리하는 현지인을 통제하기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키르는기즈스탄은 소련의 위성국가였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독립한 나라입니다. 때문에 지난 70여년동안 이곳 사람들은 노동생산성보다는 계획경제에 의한 평등성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감독이나 관리자가 시야에 없으면 일은 그만큼 늦어진다는 것입니다. 나는 교실 하나를 아예 숙소로 만들어 사용하고 이듬 해 학원 대지 안에 게스트하우스를 지을 때까지 꽤 오랜기간 교실을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한참을 사용하다 보니 그런대로 익숙해졌고 어떨 때는 시간이 많이 절약되어 편했습니다. 숙소교실 바로 옆에 부억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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