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식민지 시대 아직 미국이 독립하기 전에 미국에는 9개의 대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한 개의 대학은 1700년초에 세워진 하버드대학교입니다. 당시 강사 한 명에 학생은 아홉명이었습니다. 청교도 목사 양성으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근데 소시영어센터는 이제 학생 수가 2백명이 넘는 커다른 학원으로 변모했으니 바라던 대학교 인가를 시도해보는 것은 저로서는 당연했습니다.
대학교를 세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예산도 예산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소가 결국 사람이라는 데 교육자들의 이견은 없을 것입니다. 설립자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대학의 이념과 목적에 맞는 인재를 키워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에서 외교관으로 일 할 때 한동대학교가 멋지게 세워져 가는 것을 나는 멀리서 듣고 보고 목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초대 김영길 총장은 미국 전역을 몇 년째 돌며 사람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삼고초려를 해 대학의 리더십을 확보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미 전역에서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한국계 교수들을 설득하며 다니시는 것을 주위에서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알고 지내던 한 교수님도 결국 김 총장님에게 설득을 당하고 결국 미국 대학교의 종신 교수직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분은 미국의 사립 명문대에서 종신직 교수직으로 있었습니다. 종신직 교수는 일반 교수와 달리 그 대학에서 특별한 예우를 받는 교수로 엄격한 실적을 유지해야하는 일반 교수와는 달리 자기가 원하는 만큼 계속해서 그 대학에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분야에서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고 또 그만큼 대학에서 특권이 주어진 교수가 종신직 교수입니다. 김영길 총장은 그런 분 마저 불러들일 정도로 열정적이었습니다. 탁월한 설득력을 지니고 지구촌 이 곳 저 곳을 누볐습니다. 한편으로 그런 훌륭한 교수진을 모을 정도로 김 종창은 설득력은 물론 영적인 은사도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영어학원이 규모 있게 성장하면서 드디어 대학설립에 도전할 꿈을 꾸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난관에 봉착한 것은 두가지였습니다. 하나는 현지인 리더십을 어떻게 찾아서 세울 것인가가 첫번째 도전적인 과제였습니다. 두번째 과제는 키르기즈스탄에서 대학인가를 받아도 실제 대학 교원의 임금과 현지 조세제도, 그리고 대학의 운영비가 과연 어느 정도될 것인가가 관심사였습니다. 설립자가 설립기금을 마련한다고는 하지만 한국처럼 정부기관이 예산을 지원해주는 것도 아닌 이상, 교원 등 대학 예산을 어느 정도 책정할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키르기즈스탄에서 대학을 운영해 본 적도, 또 이 곳 교육부에서 일 한 적도 없었던 나로서는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역시 선교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God is a missionary God. 중앙아시아 청년들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주님께서 나를 창세전부터 예비해 놓았듯이 주님은 대학에 필요한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예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내가 주님께 물어보고 간구하지 않은 것 뿐이었습니다. 학원설립 2년차. 학원은 영어과, 한국어과, 컴퓨터과 등 3개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3세계 비영어권에서 단연 영어를 듣는 수강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옥스퍼드 출판사 교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학원생들은 대략 2백여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기도도중 교육부를 찾아가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따라 다짜고짜로 교육부를 찾아갔습니다. 키르기즈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각 부처에 임기를 지켜내는 전통에 따라 제1차관 제도라는 게 있습니다. 제1차관은 정부가 바뀌어도 장관이 바뀌어도 임기를 보장하는 자리입니다. 나는 제1차관 면담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1차관과의 면담을 매끄럽게 주선해 주셨습니다. 약속을 하고 가도 외국인을 만나줄까 말까 하는 데 가서 기다리니 덜컥 약속이 잡힌 것입니다. 기억으로는 인품이 있고 엔지니어 출산의 차관으로 기억되었는데, 필자의 대학 설립계획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었습니다. 면담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아니 영어 학원인데 무슨 대학을?”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오히려 제1차관은 대학을 세우려는 저를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는 “대학의 인가를 위해 학원단계에서부터 후학들을 잘 키워줄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달라”면서 “ 그럼 칼리지(전문대학)정도는 제가 고려해보겠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그 때만해도 비쉬켁 수도권에 영어학원도 거의 없었는데, 우리 학원에 대해 교육부에서도 좋은 평판을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학원이 대학교육 기관보다 더 학생들을 균형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잘 키워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한 것 같았습니다. 10년전만 해도 키르기즈 청소년들은 영어를 배우려는 열망은 많았지만 이를 해소시켜주는 데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제1차관은 치우치지 않고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이야기가 잘 진행되어 내심 다른 실무진을 연결시켜 주며 대학인가에는 이러 이러한 서류가 필요하다는 것을 내심 기대하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발전은 하지 않았지만 대학은 그렇게 쉽게 인가가 되지는 않을 거라면서 나는 다시 훗날을 기약했습니다.
학원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대학 설립에 대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후 주일이 되어 나는 언제나처럼 비쉬켁 교회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학교에서 실크로드를 따라 30분 정도 운전하고 가면 오쉬시장을 지나 비쉬켁 시내 푸룬제 거리에 한인교회를 찾았습니다. 교우들은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먼 나라에서 온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예배당은 큰 가정집 같았는데 바깥에서는 교회라는 표식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한국처럼 십자가를 세워 괜히 이슬람 교도들의 타켓이 되지 않으려는 점도 그런 이유중의 하나입니다. 교회 맞은 편에는 보란 듯 이슬람의 깃발을 꽂은 모스크가 화려한 장식을 뽐내며 대비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배는 항상 갸벼운 긴장감 속에 진행됩니다. 때때로 그 날의 예배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임하면서 감동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성도들이면 가끔씩은 느끼는 그런 감동말입니다. 주님이 나를 예비시켜 이 곳에 보내셨다는 강한 터치감을 받았을 때입니다. 러시아어와 키르기즈어로 된 찬송가에 더욱 매료되었습니다. 가사 한 단어 한 단어가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안에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이사야서 40 : 31>
지난 수년동안 대학을 세운다며 쉼 없이 달려오다 엎어지고 낙심하던 일들이 교차하면서 가사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큼 힘이 되었는 지 정말 당시는 내가 주님과 함께 날아오르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 한 켠의 암덩이 같은 지난 날의 마음의 상처를 구석구석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배가 끝나자마자 나는 성가대를 지휘했던 현지인 목사를 찾아 다녔습니다. 예배가 끝나 문 앞이 좀 어수선한 가운데 나는 아주 맑은 눈을 갖고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현지인 S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기타로 찬양을 인도하며 성가대를 이끌고 있는 40초반의 현지인이었습니다. 교회는 지난 2년간 다녔지만 우리의 대면은 처음이었습니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나누며 대뜸 성가대원이 몇명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성가대 지휘자를 비롯해 모든 성가대원을 한번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S목사님은 흔쾌히 약속을 잡아주었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주. 예배 후 우리는 한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서 만났습니다. 대원들은 지휘자 목사님을 포함하여 10명정도 왔습니다. 우리는 여러 한국음식을 시켜 놓고 한 사람 한사람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자기소개가 러시아어와 키르기즈어로 진행되면서 음식이 나와 있는데도 자기소개는 계속되었습니다. 그 때 소개가 중간쯤 돌아갔을 때 호리호리한 한 청년이 자기소개를 이었습니다.
“네 저는 마리아구요. 예비대학생입니다. 소프라노입니다….”
“네, 이 청년 어머니가 지금 교장선생님이십니다. 근데 그 교장선생님의 학교가 바로 당신 학원 이웃에 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S목사님은 친절하게도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친절을 보였습니다.
“네? 뭐라구요? 저 청년 어머니가 바로 우리 학원 근처 중고교의 교장선생님이라구요? 나는 관심을 표명하며 S목사님에게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 때를 기억해보면 S목사님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성가대원 어머니가 교육자이니, 지금 이 자리를 만든 필자도 교육자라 서로 연결되어 인연을 이어가라는 뜻에서 연결해 준 것입니다.
그 때 그 순간을 나는 아주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S목사님의 배려도 예사롭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일하는 학원 이웃의 학교 교장을 만나보라”는 주님의 은혜가 작용된 것을 눈치 했습니다. 학원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웃 여러 중고교를 친선방문 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그 성가대원의 어머니 학교도 내가 방문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학원 이웃 학교의 교장선생님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은 아닌가?
딸이 성가대원이라면 거의 어머니 역시 크리스찬이라는 공식이 성립했습니다. 나는 몹시 흥분되었지만 내심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서로의 소개를 계속 해 나갔습니다. 나의 마음은 그 성가대원과 거의 어머니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크리스찬의 비율이 0.1%도 되 지 않는 키르기즈스탄에서 우리 이웃 중고교 교장이 크리스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교제하는 동안 한국음식과 키르기즈스탄의 음식을 서로 앞서거니 소개하면서 맛있게 먹고 음식점을 나왔습니다. 그날의 만남은 내가 성가대를 격려하기 위한 만찬모임이었지만 내 머리속에는 온통 다른 감흥이었습니다. 아까 만난 청년 성가대원의 어머니가 진짜 우리 학원 근처의 중고교 교장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마음 속에 꽁꽁 얼어붙은 채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크리스찬 교육자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인 곳에서 나는 우연히 크리스찬 학교장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기뻐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웃 교장선생님과 예수님, 복음 등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풀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날 잠도 설쳤습니다.
2015년 대학교 인가를 상정하고 체육관을 한창 지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청년 성가대원 어머니를 만나 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체육관이 거의 지어질 무렵, 나는 대학의 인가 전략에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늦은 가을 햇빛이 따사롭게 비치던 날이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온 동료 C선생과 학원에서 조금 떨어진 실크로드 상의 이웃 중고교를 찾았습니다. 청년 성가대원의 어머니가 교장이라고 해서 우선은 교장선생님이 여성인 학교를 먼저 찾아 본 것입니다. 오래되고 리모델링이 되지 않아 겉에서 보기에 조금 낡아보였습니다. 하지만 오래되어 약간은 고풍스럽고 조용해서 기분은 좋았습니다. 건물 정문 오래된 플라스틱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교장실을 먼저 찾았습니다. 교장선생님 방은 비워져 있었습니다. 비서는 교장이 학급을 순회하고 있다고 말해주어 우리는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비서가 이야기를 했는 지 2층 방문을 서성이던 우리들에게 한 여성 선생님이 다가왔습니다. 약간 빼빼하고 키가 다소 큰 키르기즈인 여성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어떻게 오셨나요?”
“교장선생님이신가요?”
그녀는 우리가 자신을 찾아 온 외국인임을 알아채고 매우 친절히 대해주었습니다.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지는 않았습니다. 친절하게도 그녀는 우리를 다른 교실로 데려가 연극무대를 준비하는 교사와 학생들을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낡은 교실 이 곳 저곳, 실험실까지 보여주었습니다. 약 20분간 학교 투어를 하고 우리는 다시 교장방에 오게 되었습니다.
교장실에 앉자 마자 나는 내가 이웃 영어학원 디렉터임을 소개했습니다. 우리 학원은 이미 수도 비쉬켁까지 학생들을 통해 입소문이 난 터여서 그녀는 놀랍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자기 가슴에 손을 얹으며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 매우 기뻐했습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먼저 물었습니다
“혹시 따님이 OOO교회에 다니나요?”
“네, 비쉬켁에 있는 교회에 다니죠. 딸도 다니고 딸이 전도해서 나와 내 남편도 최근 그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어요…”
나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우연히 교회의 성가대를 격려한다고 했다가 ‘대어’를 얻은 셈이니까. 나로서는 큰 우군을 얻은 것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키르기즈 교육에 대해 전반적인 실태와 확실한 어드바이스가 앞으로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한껏 기대가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렇지않아도 학원에 들렸었어요. 근데 안계시더라구요. 우리 학교 학생들을 보내주고도 싶었고, 무엇보다 당신 학원을 통해 우리 학생들이 큰 도전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교육은 창조적이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니까요…”
그녀는 지난 2년간 만나 본 키르기즈스탄 교육자치고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뭔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남편도 국립대학 역사학 교수였고, 그녀의 시아버지 또한 키르기즈에서 아주 유명한 역사학자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또 하나 그 교장선생님이 내 마음을 사로 잡은 것은 ‘스펙’이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발레리나 공부를 한 발레학도로서 법학공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독교인에다 예술에서부터 정치사회적인 리더로서의 소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어 대학을 바라보는 우리 학원으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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