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나 이른 나이에 나는 은퇴를 경험했다. 내 나이 53세. 대학 졸업 후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능력이 빛을 볼 나이였다. 나는 언론계 생활을 하다 공직에 입문한 케이스. 정치적으로 임명된 자리여서 대개 나를 임명해 준 정부가 끝나면 함께 나오는 게 그 바닥에서는 상식이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나는 3개 정부에 걸쳐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 더 여한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이른 나이에 일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니 아쉬웠다.
내가 곧 일자리를 떠나 그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한창 생각할 그 때, 나는 모스크바 한국대사관 2층 사무실에 있었다. 지난 20여 년 간 경력 차단이 없이 일을 해왔기 때문에 떠난 다는 것이 생소했고 또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바로 그 때 나는 외교부 한 인사담당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저 위에서 어떻게 될 지는 모르지만 이력서를 한번 주실 수있나요?"
공관장 이동 철이 되어 미리 인사안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한 지역의 공관장으로 검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위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을 이야기하는 데 인사안을 짜서 그 곳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나는 속으로 "잘 하면 작은 나라라도 공관장을 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아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친구와 프랜차이즈 동업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내는 이 소식만 듣고도 아주 기뻐했고 나는 기회가 내게 주어지기만을 바랬다.
아내는 살아오는 동안 현실주의자였다. 나는 다소 이상주의자처럼 행동하면서 젊었을 때 충돌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아내는 함께 기뻐해주면서도 나를 격려하듯 한마디 덧붙였다.
"공관장이 되면 좋겠지. 다시 한번 섬기는 기회가 주어지면 더 잘 할 수도 있겠고..." "하지만 안돼도 괜찮아요. 아무 걱정 말고 안되면 짐 싸서 이 곳으로 건너 오세요. 여기 (로스앤젤레스) 참 좋아요. 지금까지는 당신이 고생하며 가족을 부양했지만 이제부터 내가 가족을 부양할 겁니다. 호호"
아내는 항상 긍정적이고 유쾌했다. 아내의 말 한마디에 나는 웬지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혼자 상상을 하며 혼자맛을 뇌까렸다. "공관장 안되고 좋고. 안되면 출마하면 되지 뭐" 나는 정치부 기자를 하는 동안 인맥으로 러시아 대사관을 떠나게 되면 단체장에 한번 출마할 생각을 갖고 준비하고 있었다. 현실주의자 아내는 그런 나의 계획을 전해 듣고는 별로 지지하지 않았다. 태생부터 정치판에서 살아 남거나 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선거운동이라도 나서게 되면 우스갯얘기로 "도시락을 싸 가며 말리겠다"는 말을 심심치않게 했다. 그리고 "선거운동 자체에도 참여 안할 것"이라며 선거 자체에 나서는 것을 반대했다.
역시 세상은 냉정했다. 공관장은 이후 소식이 없었다. 원래 외교부 출신이 아니면 대통령 정도가 위에서 정해서 내려주지 않으면 힘든 자리가 공관장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가 아직 희망의 닻을 남기고 있었다. 선출직 공직에 도전하는 일은 계속 준비했다. 내가 연을 두고 있는 경기도 권역에서 지방 자치단체장에 출마하는 일은 적극성만 띠면 출마 자체는 어려움이 없는 듯 했다. 사비로 여론조사를 해보았는데 꽤 괜찮았다. 여론조사 기관은 부추켜야 그들의 일이 계속될 수 있는 일이지만 항상 정치는 환상을 먹고 산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는 사이 나는 임기가 되어 짐을 쌌다.
그리고 아내가 권유하는대로 무작정 로스앤젤레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짐 가방 두 개를 싸들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런데 비행기 속에서 나는 내 인생의 큰 결정을 하게 되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0) | 2023.04.04 |
---|---|
말씀공부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 (1) | 2023.04.01 |